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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가요 : 배호 : 불멸의 가객, 불멸의 노래, 불멸의 목소리

내가아는세상/음악이야기

by 미스터산 2011. 2. 2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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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호 (裵湖,1942.4.24 - 1971.11.7)
한국의 대중가수 
본명 : 배만금 
예명 : 배호 
아명 : 배신웅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가수 
출생지 : 중국 산동성 제남시 
주요작품: 『돌아가는 삼각지』『비내리는 명동거리』『안개 낀 장충단공원』

1. 출생과 성장
1942.4.24.중국 산동성 제남시 경7로 위15호에서 부친 독립투사 배국민과 모친 김금순 사이에 1남 1녀중 장남으로 출생, 해방후인 1946.4.경부터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 81번지에서 생활을 했다.1949년부터1955년까지 서울 창신초등학교를 다녔다(6.25때 부산 피난후 서울 수복시 서울로 옴). 1955년 서울 영창학교(성동중 전신)1학년 1학기 마치고 부친 별세로 부산으로 내려가 이모의 모자원에서 생활하면서 부산 삼성중학교 2학년 1학기를 수료했다.


1956.8. 음악을 하기 위해 혼자 상경하여 막내 외삼촌 김광빈를 통해 드럼을 배우기 시작 음악에 입문했다. 1958년 1년만에 드럼을 마스터하고 「김광빈 악단」에서 주로 연주를 하였다. 1960년 부평 미군부대 Camp Market 관할 클럽 등에서 2년간 악단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하였다. 1963년 「김광빈 악단」및 「김인배 악단」에서 드럼을 치며 노래 부르기 시작 김광빈 작편곡의 굳바이 등 최초로 녹음하여 가수 데뷔 음반 최초 발표, 藝名을 裵湖로 지었다. 


1964년 낙원동 Prince 카바레에서 밴드 마스터로 Pick Up되어「배호와 그 악단」이란 이름으로 12인조의 풀 밴드 구성하여 드럼치며 노래하는 가수로 장안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같은해 반야월 작사 김광빈 작곡의 [두메산골]과 정성수 작사 김인배 작곡의 [황금의 눈] 등을 발표하였다. 1966년 신장염 발병으로 투병 생활 시작 [누가 울어, 안개속으로 가 버린 사랑] 등 10여곡 병상 취임 당시 노래의 여러 군데에서 가쁜 호흡으로 인하여 가사를 짧게 끊어서 부른 흔적이 있다. 



1966년 가을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청량리 단칸방에서 투병생활을 하던중 신진 작곡가 배상태를 만나 그의 대표곡이자 최대 힛트곡인 [돌아가는 삼각지]를 취임하여 1967년 4월에 음반을 발표, 특색있는 음색과 신기의 호소력으로 전국 인기챠드를 휩쓸면서 정상의 인기가수로 부상하다. 이어서 발표된 최치수 작사 배상태 작곡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연속 힛트함으로써 인기가수로 확고한 위치를 굳혔으며 그해부터 각 매스컴 주최 행사에서 수상 릴레이가 시작되고 1968년 MBC 10대 가수상 수상- 라디오 등 인기 정상과 더불어 몸이 회복되면서 왕성한 가수활동 시작하여 힛트곡 [안녕] 및 주옥같은 번안곡 등 생애 최고로 활발한 활동과 노래를 발표하면서 본인이 내 생애 최고의 한해로 말할 정도로 전국적인 인기를 차지 하면서 가을부터 TBC, KBS, MBC 등 주요 가요 가수상을 휩쓸었다. 


1969년 1월 아세아레코드사 전속에서 신세기레코드사 전속으로 소속을 옮기면서 무겁고 어두우면서도 가일층 성숙된 톤으로 [한목숨 다바쳐][당신] 등의 명곡을 남겼다. 공개방송.업소출연.지방공연 등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 재발로 신한의원 입원중 12월 MBC TV 10대 가수상 수상시에는 동료가수(이상렬 등)의 등에 업혀 출연 청중들을 숙연하게 한 가운데 청중들로부터 쾌유를 비는 감격스러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모친 김금순과 함께

1970년 5월부터 몸이 어느정도 회복되어 서울 시내 극장무대를 시작으로 다시 공연활을 시작 백영호 작곡의 [비내리는 명동] 등 많은 곡을 취임하였고, 生의 觀照的 분위기의 곡들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연말 MBC TV 10대 가수상 수상에는 건강하고 밝은 표정으로 트로피를 들고 관중을 향해 인사하다. 동년 2월 문산 공연중 병세의 악화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치료하다. 동년 3월 몸이 좋지 않은 상태로 대도레코드사에서 지난 힛트곡들을 마치 굵은 붓으로 거칠게 텃치하는 듯한 톤으로 리바이벌을 하였다. 동년 여름 그의 마지막 곡들인 [0시의 이별][마지막 잎새] 등을 취입하였다. 동년 10월 초까지 죽어도 무대에서 쓰러지겠다는 초인적인 의지로 극장. 업소 등의 무대에 섰으며, 어떤 때에는 음악만 틀어 놓고 그대로 무대에서 서 있기도 하였다. 


1971년 10월 20일 MBC '별이 빛나는 밤에'(진행:이종환) 출연후 감기 증세와 함께 신장염 악화 27일 신한의원 입원. 동년 30일 세브란스 병원 입원 이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메다가 11월 7일 더 이상 가망이 없지 퇴원 미아리 집으로 가던중 완전 의식불명 그날 저녁 9시 45분경 자택에서 운명하였다. 동년 11월 11일 예총회관(현 세종문화회관) 광장에서 가수협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 경기도 장흥소재 신세계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서울의 여러 명소들을 노래 불렀는데 '삼각지 로타리'와 '안개낀 장춘단공원' 비내리는 명동거리' 등 추억속에 그러한 곳을 상징처럼 지난날의 사랑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슬픈사연이 깃든 애상의 표현으로 노래한 것은 어쩌면 배호 자신의 운명 같은 가련함을 추억속에 그려보며 구슬프고 애달프고 절절하게 구수한 목소리로 불러진 노래들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배호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친 4째 외삼촌 김광빈 내외


2. 작품소개 및 수상경력 

두메산골(1963년) 

황금의 눈.앨범1집(1964년) 

돌아가는 삼각지(1967년) 

MBC 10대 가수상 수상(TV)(1969년,1970년) 

서라벌가요대상 등 29개 부분 수상(1970년)

MBC(TV)특집여론조사(가수 기여도 1위) 

최초가요 60년사 여론조사(좋아하는 가수 1위) 

조선일보 건국이후 음악전문가 여론조사(음악성) 가수 50명중 6위 

음반은 독집 20여장을 포함해 약 70여종 

데뷔곡 두메산골을 비롯하여 250여곡 발표



3. 노래비 건립내역 

2001.11.13.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삼각지 교차로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 건립 

2002.4.21.경기 양주군 장흥면 신세계공원묘지 배호 유택에 <두메산골> 노래비 건립 

2003.6.22.경주시 현곡면 소재에 <마지막 잎새> 노래비 건립 

2003.7.12.강릉시 주문진 소재에 <파도> 노래비 건립



4. 배호를 추억함

우리나라 최초로 가수 이름을 따 제정된 길은 다름 아닌 ‘배호길’이다. 서울 용산의 삼각지 로터리에 있는 400m 구간이다.

이 길이 ‘배호길’로 명명된 것은 지난 2000년 11월. 배호는 1963년 스물한 살에 데뷔해 71년 스물아홉에 타계했다. 가수로써 배호의 활동기간은 불과 8년. 서른 문턱을 채 넘기지 못하고 타계한 지 올해로 만 35주기가 된다.

드러머 출신의 ‘북재비 무명가수’로 출발해서 전성기를 맞을 때 신장염을 앓아 사투를 반복했던 그의 첫 취입곡 제목은 하필 ‘굿바이’였다. 또 마지막 취입곡 제목은 ‘마지막 잎새’와 ‘0시의 이별’이었다.

우리 대중가요의 주 테마가 ‘사랑과 이별’임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발표곡 중 ‘안녕’이나 ‘또 하나의 이별’ ‘파란 낙엽’ 등의 단어들이 암시하듯, 배호는 활동기간 내내 늘 일찍 닥쳐올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은 인상마저 받게 한다. 때문에 그의 노래들이 더욱 팬들의 가슴을 적시는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노래들 중 현재 ‘돌아가는 삼각지’를 시작으로 ‘두메산골’ ‘파도’ ‘마지막 잎새’ 등은 노래비로 남겨져 있다. 또 ‘배호 가요제’도 1년에 세 차례, 그 것도 각각 다른 단체에 의해 개최되고 있다. 저간의 사정을 제쳐두고라도 이러한 현상은 분명 한국 대중문화 풍토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배호의 막내 외삼촌이자 작곡가·연주인인 김광빈(80)씨에게 ‘배호 스토리’를 들어봤다. 본명 배만금.42년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부친 배국민과 모친 김금순 사이의 3대 독자로 태어난 배호의 직계 혈육은 이제 아무도 없다. 세살 때 해방이 되면서 귀국 행렬에 합류, 월남했다. 타고난 음악적 자질은 외탁인 듯하다. 어머니 형제는 4남2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인 김광수는 셋째 외삼촌이고 막내인 넷째 외삼촌이 바로 김광빈씨다.

배호에게 첫 취입곡 ‘굿바이’를 만들어준 김광빈씨는 배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어린 시절, 만금은 독립운동을 하던 부친을 대신해 막내 외삼촌의 손에 의해 자랐고 김씨의 등에 업혀 한국 땅에 도착했다. 음악을 하고 싶어 중학교 2학년을 중퇴했다. 무작정 막내 외삼촌을 찾아 상경한 배호는 열여섯 살 때 ‘김광빈 악단’에서 드러머로 첫 음악생활을 시작했다.‘배호’라는 예명도 김씨가 지어준 이름이다.

“배호의 ‘호’자가 늪 ‘호(湖)’로 운명이 그 이름을 따라간 것 같아 늘 마음이 아픕니다.”

이름을 호랑이 ‘호(虎)’자로 쓰지 못했던 것이 내내 아쉽고 마음에 걸린다는 김씨.“배호는 음폭이 매우 넓은 가수였습니다. 보통 18음을 넘어 19음까지 구사했는데 저음은 물론 고음도 일반 여성보다 세 음이나 더 올라갔지요.”

배호의 발성은 악보의 오선지 밖을 지나 ‘솔’ 음까지 구사할 정도였다고 김씨는 회고한다. 배호의 트레이드 마크인 중절모와 검은 뿔테안경도 나이가 들어보이게 하기 위해 그가 권유한 것이고 현재 경기도 장흥 신세계공원에 안치돼 있는 배호의 묘에 세워진 노래비 ‘두메산골(반야월 작사)’ 또한 그의 작품이다.

배호는 악단 시절 취입한 첫 노래 ‘굿바이’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가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김인배 작곡의 영화주제가 ‘황금의 눈’을 발표했던 66년도부터다.

데뷔곡 ‘굿바이´에서부터 마지막 취입곡 ‘0시의 이별´까지 무수한 명곡을 남긴 가수 배호씨의 노래는 대부분 悲歌이다. 예명을 지어준 김광빈씨는 호자를 虎로 않고 湖로 쓴 것이 못내 맘에 걸린다고 회고했다.

이 노래가 제법 방송을 타기 시작하면서 배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나타난 인물이 당시 월간 ‘아리랑’의 연예기자였던 유명 작사가 전우(본명 전승우)다. 이후 배호의 후견인 역할까지 맡는다. 전우는 당시 MBC PD로 있던 작곡가 나규호와 콤비를 이뤄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과 ‘누가 울어’를 비롯한 노래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배호 노래비 주문진 파도


이 무렵 배호는 신장염이 더욱 악화돼 두 달 간 무대를 떠나 있어야 했다. 이때 배호를 찾아온 또 한 사람이 바로 ‘돌아가는 삼각지’의 작곡가 배상태(71)씨.‘돌아가는 삼각지’는, 당시 아세아레코드사 전속가수 김호성에 의해 먼저 녹음됐다. 

병실에서 연습한 ‘안개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를 불러줄 가수로 배호를 수소문해 찾아갔을 때 그는 청량리에 있는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더군요. 한 눈에 보기에도 병세가 심해 거동은 물론, 호흡조차 가빠 보였습니다.”

결국 취입을 만류하는 배호의 어머니를 설득해 ‘돌아가는 삼각지’를 취입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들은 인근 여관에서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연습을 했고 며칠 뒤 장충스튜디오에서 노래를 취입했다. 이때가 67년 3월16일. 이 노래의 배경이 되는 삼각지에는 67년 2월부터 착공된 원형 입체고가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삼각지의 노래비


“배호는 처음 녹음에 들어가기 전부터 매우 힘들어보였으며 노래가 끝날 즈음에는 아예 앉아서 취입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장충녹음실에 근무하던 최길순(58·현 수창녹음실 대표)씨. 녹음날짜가 잡혔는데도 배호는 잘 나타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결국 그해 4월 2일 배호는 전우-나규호 콤비의 새 노래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과 ‘누가 울어’를 비롯한 13곡을 대도스튜디오에서 취입한 뒤 뉴스타레코드사를 통해 첫 독집음반을 발표한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몇몇 가수들에게 취입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하지만 배호의 음성으로 나간 후 예상을 뒤엎고 각종 인기차트 상위에 랭크되기 시작한다.

“배호가 급부상하자 아세아레코드사 측은 서둘러 전속금 30만원에 월 1500원을 주고 그를 전속가수로 영입했고 이 전속금으로 배호는 비로소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히트곡 ‘안개 낀 장충단공원’(7월14일)은 이때 병실에서 연습했던 곡이지요.”

배상태씨는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세아 측은 내친김에 뉴스타에서 발매된 배호의 독집음반 판권마저 사들여 아세아 레벨로 바꿔 다시 음반을 찍어내기 시작했다.68년 1월, 수록곡들을 새로 편곡해 재취입한다. 이렇게 해서 재탄생한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과 ‘누가 울어’를 비롯해 그가 발표하는 대부분의 노래들은 대히트를 기록하며 배호는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러나 병마에 시달리던 배호의 호흡은 늘 불안했다. 때문에 배호는 무대에서 그때그때 감정과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으로 싱커페이션(syncopation)과 앤티시페이션 (anticipation)을 적절히 구사해 불안한 호흡을 스스로 조절했다. 드러머 출신가수답게 리듬 감각은 탁월했던 그는 당겼다, 놓았다 하는 애드리브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창조해 멋진 창법을 한껏 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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