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북한산 등산코스 : 삼각산의 오지탐험 제44탄-서울성곽종주

북한산명품코스/평창동기점

by 미스터산 2011. 1. 21. 14:51

본문



코스개요 : 돈의문-딜쿠샤-인왕산-창의문-북악산-숙정문-와룡공원-혜화문-낙산-흥인지문-동대문역사공원-광희문-국립극장-남산-숭례문-서소문-정동극장-돈의문

들머리 : 서대문역 4번출구 강북삼성병원 돈의문터

날머리 : 서대문역 4번출구 강북삼성병원 돈의문터

소요시간 :  9시간

등산분류 :  워킹

등산화 : 워킹화

준비물 : 행동식

계절적합성 : 봄-가을-여름-겨울

문화재 : 4대문, 사적제10호 서울성곽

경유능선 :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

뷰포인트 : 인왕산정상, 북악산정상, 숙정문, 혜화문, 낙산공원, 동대문, 광희문, 남산, 숭례문

코스상세안내 :

 

서울성곽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태조 4년(1395)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살피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인왕(仁王)·목멱(木覓)·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네 산을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에 걸쳐 무려 11만 8,000여명이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지구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글자를 표시하여 백악 동쪽에서부터 천(天)자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 이르러 조(弔)자까지 구획하여 공사를 하였다. 공사는 구역마다 책임자를 두어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축성한 고을의 이름을 새겨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평지는 아래 부분이 25척, 윗 부분이 18척 되는 너비로 높이 25척의 규모로 흙을 쌓았는데, 그 성벽의 길이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를 쌓고 그 좌우에는 돌로 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해 가을에도 8만명의 정부(丁夫)를 동원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돌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이란 동쪽의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가르킨다. 이 가운데 흥인문에만 옹성(甕城)을 쌓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숭례문은 1396년에, 흥인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세종 4년(1422)에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바꾸면서 더 높게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女墻)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약 32만 2, 000명의 인부가 동원된 이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로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관리를 전담케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때 수축이 있었고, 숙종(肅宗) 30년(1704) 3월부터 약 5년간에 걸쳐 3군영(三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 975보, 성첩(城堞) 7, 081개로 만드는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영조 19년(1743)에도 부분적인 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으며, 고종 6년(1869) 동대문의 개축이 있었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처음 축조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이 있었는데, 세 차례의 축조는 축조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이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래 부분은 비교적 큰돌로, 윗 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으나,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와 세로가 2척 규모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러한 축조술의 변화는 조선시대 축성술의 전반적인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지방의 읍성(邑城)과 산성(山城)에도 적용되어진 모범이었다. 1915년 일제는 근대 도시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하여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그 결과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의 성벽과 숭례문·흥인지문·숙청문ㆍ창의문ㆍ광희문 등이 전체 또는 일부 남게 되었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돌로 된 성벽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 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이후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청문ㆍ광희문의 문루가 복원되는 등 계속적인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1. 서대문역 4번출구로 나와 강북삼성병원 오른쪽 언덕에 돈의문터 표지석에서 출발한다.

2. 경교장

3. 서울시 교육위원회

4. 홍난파 생가

5. 구세군영천교회

6. 은행나무(권율장군생가터)

7. 서울성곽 안내판

8. 인왕산 산책로 조망터

9. 인왕산길

10. 인왕천약수터

11. 능선 범바위갈림길

12. 인왕산 정상

13. 기차바위 갈림길-창의문 방향

14. 성곽철계단 성곽 바깥으로 이동

15. 부암동 사무소 갈림길

16. 성곽 철계단 안쪽으로 이동

17. 인왕산길

18. 팔각정- 윤동주 시인의 언덕

19. 자하문 고개

20. 창의문

21. 창의문 쉼터-북악산 출입절차(신분증확인)

22. 돌고래 쉼터

23. 제2쉼터

24. 북악산 정상(342m)

25. 숙정문

26. 말바위쉼터-출입증반납

27. 삼청공원, 와룡공원 갈림길

28. 와룡공원

29. 서울돈가스, 경신고 사잇길

30. 혜화문

31.한성대 입구역 5번출구진입-3번출구 진출후 동소문동 이정표

32. 동소문동사무소앞

33. 성곽길 갈림길

34. 낙산, 낙산공원

35. 동대문(흥인지문)

36. 오간수교(청계천)

37. 동대문역사공원

38. 동대문역사공원역 3번출구옆 횡단보도 건넘

39. 광희문

40. 장충동 사무소 안내 표지판

41. 성당 안내 표지판

42. 장충동 체육관 앞 횡단보도 건넘

43. 서울성곽

44. 성벽옆 산책로

45. 팔각정

46. 한국자유총연맹 건물쪽 철계단 내려감

47. 한국자유총연맹앞

48. 국립극장앞 횡단보도 건넘

49. 국립극장

50. 순환도로- 성곽 옆 목재 계단길

51. 남산한옥 마을 갈림길

52. 남산타워, 목멱산 봉수대

53. 서울시 교육정보센타

54. 숭례문(남대문)-국보제1호

55. 서울역방향 버스정류장 횡단보도 건넘

56. 상공회의소앞 서울성곽 안내판- 복원된 성곽따라

57. 중앙일보 야외 ㅈ차장 우측으로 끼고 돌면 서소문대로 만남

58. 서소문터(소덕문)

59. 시위병영터

60. 횡단보도 건너서 정동길 갈림길, 덕수궁 갈림길

61. 이화여고

62. 정동극장

63. 돈의문터 날머리 도착(원점회귀)

 




경교장

김구선생의 집무실

홍난파 생가

딜쿠샤

인왕산 등산안내도

금호랑이


창의문

창의문

북악산정상석

성북동생선구이집 참맛있습니다. 점심먹었어요.




혜화문

낙산 오름길



동대문 드디어 절반을 오다

동대문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